조선왕조 마지막 공주의 슬픈 스토리
영화 덕혜옹주는 1912년 고종의 딸로 태어나는 것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덕혜옹주의 어린시절 역은 김소현 배우가 연기하였고 전체적인 주인공은 배우 손예진이 맡았습니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태어나게 되는데 딸이 태어나자 예뻐하며 아낍니다. 고명딸이란 남자형제가 전혀 없고 딸만 하나인 집인 외동딸과는 달리 남자형제만 있고 여자형제가 없는 것을 고명딸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시대가 되자 아들을 일본에 인질로 보내야 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예뻐하던 딸마저 보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3세인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결혼을 시키려고 추친하게 되지만 일본이 고종을 독살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결혼이 무산되어 덕혜옹주는 힘이 없었던 왕 순종의 통치하에 어머니(박주미)를 지키기 위하여 일본에 유학이라는 명분하에 인질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게 되고 일본에서 영친왕(박수영)과 복순(라미란)과 함께 지내며 겨우겨우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새로운 소위가 발령되어 오고 그 사람이 고종이 살아있을적 자신과 혼인을 맺을뻔한 김장한(박해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사실 김장한은 친일파인 한택수(윤제문)과 친하게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청년이었습니다. 이우 왕자(고수)가 조선의 독립을 위한 단체를 만들어 조선 왕족들의 조선귀환을 도우려고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일본으로 건너와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던 일본의 공장에서 손가락이 잘리도록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인 노동자들이 태업을 일으킬까 걱정되어 이를 막기 위해 덕혜옹주를 이용하려고 합니다. 덕혜옹주에게 일본 정부는 자신들이 연설문을 써주고 그대로 읽으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협박합니다. 하지만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그 연설문을 도저히 읽어줄 수 없었던 덕혜옹주는 조선말로 노동자들에게 위로를 건네며 힘을 주는 연설을 합니다. 이를 보고 친일파인 한택수는 복순을 먼저 조선을 보내고 덕혜옹주에게 일본 귀족인 소 다케유키(김재욱)과 결혼하도록 주선하게 됩니다. 하지만 속으로 김장한을 좋아하고 있던 덕혜옹주는 강력하게 저항하고 맙니다. 마침내 일본에 머물고 있던 영친왕, 덕혜옹주 등 일본에 머물고 있는 조선 왕족들을 상하이로 망명시키기 위한 작전이 펼쳐졌습니다. 상하이에서 폭탄을 들여온 독립군들은 일본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거물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폭탄을 터트리게 되고 망명을 실시하지만 한택수로 인하여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도망가던 덕혜옹주와 김장한은 한 비어있는 집에서 상처를 치료하고 총에 맞은 김장한을 체온으로 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군이 다시 공격하게 되고 그녀를 비밀통로로 피신시킨 뒤에 일본군과 맞서 싸웁니다. 바다로 도망쳐 배를 타고 망명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그 배에 한택수가 타고 있었고 그가 쏜 총에 맞아 김장한은 다리를 다치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망명은 실패하게 되고 결국 덕혜옹주는 한택수가 주선한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됩니다. 다케유키는 결혼한 덕혜옹주를 행복하게 해주려 하지만 딸 정혜를 낳고도 계속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마침내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조선의 광복 소식을 들은 덕혜옹주는 눈물을 흘리며 조선으로 입국하려 하지만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왕족들의 입국이 거부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다케유키와도 결국 이혼한 덕혜옹주는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병원에서 그녀는 폐인이 되어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그녀를 찾아온 김장한은 변해버린 그녀를 보고 큰 충격에 빠지게 되고 간곡하게 설득하여 결국 그녀의 귀국을 허락받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원에 있던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구출 작전 때 그녀에게 한 약속을 외치고 이로인해 기억을 되살린 덕혜옹주는 김장한을 안아주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중나온 황실의 궁녀를 만나 눈물을 흘리며 재회합니다.
실제 덕혜옹주는 어땠을까
덕혜옹주는 실제로 고종이 59세에 얻은 늦둥이이자 유일한 딸이어서 극진한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덕혜옹주가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에 황실 최초의 유치원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항상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대기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치원 졸업 후 일본인 학교에 입학했으며 실제로 13세의 나이에 일본으로 강제 유학을 떠나 일본에 있는 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덕혜옹주는 신경쇠약에 걸려 몽유병과 조현병 증세도 보였다고 합니다. 소 다케유키와 결혼한 덕혜옹주는 딸 정혜를 출산하고도 조현병과 여러가지 병에 시달리고 결국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딸 정혜는 결혼하고 직후 실종되었고 후에 덕혜옹주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말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조선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자라던 덕혜옹주가 일본에 가서 여러 고초를 겪으며 정신병을 겪고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게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