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을 가늠하기 어려웠던 작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인해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한 달만에 낙동강 부근을 제외한 지역을 전부 뻬앗기고 말았습니다. 북한군이 밀고들어오는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우리나라 군인과 UN군이 힘을 합쳐 싸우고 있었습니다. 1950년 9월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뒤로 하고 더글라스 맥아더(리암 니슨) 장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합니다. 성공확률이 낮은 작전에도 이 작전을 성공시키려면 인천으로 가는 길을 확보해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 장학수 대위(이정재)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해군 첩보부대에 투입되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의 지시로 대북 작전에 투입된
이들은 인천으로 가는 기차안에서 북한군 정치장교와 부하들을 죽이고 그들로 위장하여 잠입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정보인 인천 앞바다에 설치된 기뢰는 림계진 인천 방어사령관(이범수)가 직접 최고 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알려주지 않습니다. 림계진 방어사령관은 박남철 중좌(장학수 대위)를 아끼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의심하게 됩니다. 작전 날짜가 다가오면서 초조해진 장학수 대위는 림계진 방어사령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 정보를 훔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장학수 대위와 림계진 방어사령관이 술을 마시게 되고 그 동안 정보를 빼내려는 작전을 세웁니다. 정보가 담긴 지도를 훔치다가 총위에게 들키게 되고 그를 총으로 위협해 금고를 열게 합니다. 그러나 틈을 타고 류장춘 총위가 빠져나와 반격을 하게 되며 그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정체가 발각된 장학수 대위와 그의 대원들은 림계진 방어사령관과 총격을 벌이고 장학수 대위는 탈출에 성공하게 됩니다. 장학수 대위는 쫓기는 사이 북한군이 자주 가는 이발소의 이발사인 최중석의 도움으로 몸을 숨기게 되는데 그 곳은 시립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인 한채선의 집 지하실이었습니다 .최석중은 장학수를 숨기고 이를 쫓던 림계진 방어사령관이 집으로 들이닥치게 됩니다. 그는 집안을 샅샅히 뒤졌지만 결국 지하실을 발견하지 못하였고 화가 난 그는 인민재판을 열어 최석중을 사형에 처하게 합니다. 장학수 대위는 켈로부대와 접선하게 되고 기뢰가 설치된 곳을 알고 있는 류장춘 총위를 납치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장학수 대위는 간호사인 한채선의 도움으로 의사로 잠입하게 됩니다. 엑스레이를 찍으려는 류장춘 총위를 침대채 끌고 나가며 납치하게 되고 그 와중에 두명의 대원이 사망하여 두 명은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습니다. 기뢰의 위치를 파악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결정하고 장학수 대위는 류장춘 총위가 말한 월미도로 가기로 합니다. 하지만 월미도에는 림계진 방어사령관의 부대가 위치해 있었고
우리나라 군대와 유엔군의 연합군의 상륙을 막기 위하여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해안에 위치한 포병들은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조준 발사하려 했지만 장학수 대위가 저지하는 바람에 전멸하게 됩니다. 림계진 방어사령관은 부상을 당하지만 간신히 도망쳐 전차에 올라타고 장학수 대위를 공격하려 합니다. 하지만 장학수 대위가 전차에 포탄을 쏴 전차를 멈추게 하고 작전이 성공했음을 알리기 위하여 조명탄을 쏩니다. 하지만 아직 사망하지 않았던 림계진 방어사령관에게 총을 맞아 둘의 마지막 결투가 벌어집니다. 결투 끝에 결국 두 사람 다 죽음에 이르게 되고 팔미도로 향했던 나머지 대원들은 작전 성공의신호탄을 쏩니다. 그 신호를 따라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게 됩니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출연진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이재한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주연에는 이정재, 이범수, 리암 니슨, 진세연 배우가 활약했습니다. 헐리우드 배우 리암 니슨의 출연 소식에 당시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실제로 700만명의 관객 수를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었습니다.
실제 인천상륙작전의 스토리
실제로 인천상륙작전은 코드네임 크로마이트 작전으로 보안을 위하여 작전 내용과 전혀 연관이 없는 단어 중 크롬 광석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와 해군본부는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었습니다. 그 이유는 적에 의해서 각개격파의 위험이 있고 낙동강의 방어선을 확보하기 힘들었으며 선박이 부족하였고 지형적이나 해양적인 조건이 적합하지 않아 인천 대신에 군산으로 상륙할 것을 제안하였었습니다. 또한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인천 앞에 위치한 월미도가 장애물이었으며 낮에 상륙할 시 적이 공격하는 것에 취약한 점이 있다는 등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맥아더 장군은 혼자서 계속하여 인천을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후방을 완전하게 단절할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